제4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22/17 > 교과토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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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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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7-15 06:16 조회1,9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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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9분

 

● 연구 범위 : 갈 2:15~21, 엡 2:12, 빌 3:9, 롬 3:10~20, 창 15:5~6, 롬 3:8

● 기 억 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그가 옹호하는 믿음과 베드로의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베드로와 공개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이교도들과 더 이상 식사하지 않기로 한 베드로의 결정은 그들이 2등급 신자라는 암시였으며, 그들이 정말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고, 한 식솔로서 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이런 긴장 상황에서 바울이 실제로 베드로에게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주에 우리가 공부하려는 본문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는 일종의 요약 같은 것이다. 이 본문은 신약을 압축해 놓은 언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본문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복음을 이해하고 갈라디아서의 남은 부분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토대가 되는 단어와 구절들을 우리에게 처음 소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볼 핵심 단어들은 ‘의롭게 됨’, ‘의’, ‘율법의 행위’, ‘믿음’ 그리고 단순한 믿음이 아닌 ‘예수 믿음’이다.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런 용어들을 사용했을까? 그 용어들은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주는가?

 

※ 학습 목표

깨닫기 :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이해한다.

느끼기 : 스스로 자격을 갖추려는 행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함으로 얻는 안식을 경험한다.

행하기 :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의 생명이 아닌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➊ 그대는 어떤 경우에 재림신앙에 자부심을 느낍니까?

※ 재림신앙은 성경의 바른 진리 위에 서 있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➋ 유대인의 특권의식은 그들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키게 하려는 오만에 빠지게 했다. 

➌ 그대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죽은 자가 자기 행위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➍ 칭의가 순종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유대인 신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칭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예수님의 생명의 선물이다. 유대인의 사상은 사망한 자가 살아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➎ 칭의의 기초가 되는 믿음은 ‘나의 믿음’입니까? ‘예수의 믿음’입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첫째는 예수님의 믿음 곧 신실함이고 다음은 그런 예수님께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➏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위해 그대는 재림신앙의 특권을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 생명의 복음을 깨닫고 증거해야 할 것이다. 

 

결론 :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용서와 회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 앞에 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자아에 대해서 죽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으로 사십니다.

 

 

첫째 날(일) ‘칭의’의 문제(갈 2:15~16)

7월 16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 2:15~16).

 

우리는 갈 2:15의 말씀을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서두에서 유대인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이 동의할 만한 사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했던 전통적인 구분을 언급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으며,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누렸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죄인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행위를 제한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약속의 언약 밖에 있었다(엡 2:12, 롬 2:14).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이 명백한 “죄인”이었을 때, 유대인들이 그 영적 특권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가납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바울은 갈 2:16~17에서 “의롭게 됨”이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칭의(의롭게 됨)”는 어떤 의미인가?(출 23:7, 신 25:1 참고)

[갈2:16,17]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출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답: 재판 판결에서 죄가 없다고 선고를 받는 것이다. 

 

“의롭게 하다(justify)”라는 동사는 바울에게 중요한 단어이다. 이 말은 신약에서 서른아홉 번 사용되는데 그 중 바울 서신에서 스물일곱 번, 갈라디아서에서 여덟 번, 갈 2:16~17에서만 네 번 등장한다. 이 말은 어떤 피고의 혐의에 대한 재판관의 무죄 선고와 관련이 있으며 반대말은 정죄(condemnation)이다. ‘정의로운(just)’과 ‘의로운(righteous)’은 같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말은 그가 “의로운 자”로 간주됨을 뜻한다. 따라서 칭의는 단순한 사면과 용서를 넘어서 그 사람이 의롭다는 긍정적인 선언까지 내포한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는 관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언약을 중심으로 하는 주제였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공동체의 신실한 일원으로,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였다.

 

<부가설명> 우리 신약성경에 공의와 의로움이라는 말은 다 헬라어 ‘디카이오스’를 번역한 말이다. 교과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공의, 곧 정의와 의로움은 같은 사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같다. 이 단어는 재판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을 뜻하고, 또 이 단어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있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는 자, 그리하여 마음이나 삶을 바로 잡을 필요가 없는 자에게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디카이오스’로 불릴 수 있다.(행7:52, 행22:14, 벧전3:18, 요일2:1,) ‘거룩하고 의로운’,(행3:14) 예수님 외에 사람 중에서 단 한명이라도 ‘디카이오스’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부정한다.(롬3:10, 전7:21). 첫째는 재판에서 죄가 없다고 판결을 받는 것이다. 다음은 그런 판결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의로우심 것처럼 의롭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누구든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시고 예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든지 도덕적으로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고 해도 예수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다. 

 

교훈 :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위임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의롭게 되는 길은 그 특권과는 무관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둘째 날(월)

7월 17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1. 바울은 갈 2:16에서 3번이나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란 어떤 의미인가?(갈 2:16~17, 3:2, 5, 10, 롬 3:20, 28)

[갈2:16,17]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3:2,5,10]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롬3:20,28]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답: 율법에 기록된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자기의 노력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그가 말하는 “율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어 ‘노모스(율법)’는 바울 서신에서 121번 나타난다. 이 말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 모세오경, 구약성경, 일반적인 원칙 등 여러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 전체를 의미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도덕법이든 의식법이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명령과 요구와 관련이 있다. 바울의 주장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며 순종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실 만큼 우리의 순종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생각과 행위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계명에 대한 ‘철저한’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라는 말은 바울의 글 외에는 구약이나 신약에서 사용된 예가 없다. 그런데 1947년에 예수님 시대의 유대 분파 가운데 하나였던 에세네파가 필사하여 모아 둔 사해사본이 발견되었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 드러났다. 비록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지만 문서들 중 하나는 정확히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문서의 이름은 ‘미크사트 마아아스 하-토라(Miqsat Ma’as Ha-Torah)’ 즉 ‘율법의 중요한 행위’였다. 이 문서는 거룩한 사물을 부정한 것으로부터 보존하고, 유대인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하라는 율법을 기초로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사본의 저자는 이 “율법의 행위들”을 지키면 “그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과 달리 그는 믿음이 아닌 행위에 기초한 의를 말했던 것이다.

 

<부가설명> 율법의 행위라고 할 때에 먼저 율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교과 저자는 말했다. 당연하다. 우리는 율법이라고 하면 아주 상식적으로 십계명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대로 바울이 율법이라고 했을 때에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 모세오경, 구약성경, 일반적인 원칙 등 여러 의미가 있다.” 이것들을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려는 것이 율법의 행위이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된 사람들은 이것을 노력으로 행할 수 없다. 이유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분명히 말했다. 왜 그런가 하면 육신에 있는 자, 곧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어야 생활이 되는 율볍을 생활할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인 영생의 생명을 얻을 때에 그 생명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생활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거듭나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자가 된다.(요3:5,6, 롬8:9) 

 

교훈 :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란 구약의 모든 율법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적 자세였다.

 

 

셋째 날(화) 칭의의 기초

7월 18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우리는 유대인 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간과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순종이 칭의를 이루는 데 뭔가를 더할 수 있고 믿음은 순종으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칭의가 믿음과 행위로 주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바울이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대조했던 이유는 그들의 접근 방식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믿음, 오직 믿음만이 칭의의 기초이다.

바울에게 믿음은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갈 2:16에 두 번에 걸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된 구절은 다른 번역이 표현할 수 있는 의미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예수의 “그 믿음” 또는 “그 신실함”이란 뜻이다. 이런 문자적 의미는 바울이 우리의 행위를 말하는 율법의 행위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위 즉 그분의 신실함으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역사(役事)를 명확하게 대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믿음이 칭의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 자체에는 공로가 없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역사를 붙잡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초하여 의롭게 된다. 단지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셨다. 그분만이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신실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위대한 진리이며 마르틴 루터가 설교했던 수백 년 전이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핵심적인 진리이다.

초기 시리아역은 갈 2:16을 이렇게 적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메시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그분, 곧 예수 메시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부터, 메시아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함이다.”

 

<부가설명> 믿음이라는 말은 아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구체적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라고 하면 똑 부러지게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언어는 하나의 부호이다. 어떤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부호이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약속이다. 믿음이라는 말도 약속이다. 헬라어 믿음이라는 말은 ‘피스티스’이고 동사는 ‘피스튜오’이고 형용사는 ‘피스토스’이다. 동사 ‘피스튜오’는 ‘맡긴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명사 ‘피스티스’는 ‘맡긴 것, 맡기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형용사 ‘피스토스’는 ‘신실하다, 성실하다, 맡길만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 자신을 맡겨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면 맡은 자가 마음대로 맡긴 사람을 사용할 수 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맡은 자가 마음대로 하도록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를  예수께서 마음대로 하도록 맡긴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예수께 자신을 맡긴 것이 의’라는 말이다. 앞으로 설명할 자리가 나오기를 바라는데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의’가 무엇인지 또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 분명하여질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일들을 붙잡는 손이라고 교과 저자가 설명했는데 이런 설명보다는 예수님께 자기를 맡겨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헬라어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 의미이다. 우리는 참으로 맡겼는가?

 

교훈 : 칭의의 기초는 율법의 행위나 우리의 믿음에 있지 않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함과 그분의 신실함에 있다.

 

 

넷째 날(수) 믿음의 순종

7월 19일

 

바울은 믿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토대임을 분명히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약속들을 주장할 수 있는 방편이다. 

 

1. 그러나 믿음이란 진정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에 관한 것인가? 다음의 성경절은 믿음의 근본 의미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창 15:5~6, 요 3:14~16, 고후 5:14~15, 갈 5:6)

[창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요3:14~1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답: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인데 곧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어느 날 인간이 갖기로 결심하면 생기는 그런 느낌이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깃든 심령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성경에서 믿음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행동을 믿음보다 우선시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경우 믿음이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창 15:5~6). 한편 바울은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깨달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2.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라면 어떤 것이 그 반응에 해당하는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다음의 성경절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보라(요 8:32, 36, 행 10:43, 롬 1:5, 8, 6:17, 히 11:6, 약 2:19).

[요8:32,36]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롬1:5,8]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답: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상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리스어로 ‘믿다’라는 말의 명사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신앙으로 정의하는 것은 ‘믿음이란 믿음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일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수용하겠다는 지적인 동의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관념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왜곡된 관념들은 실제로 믿음을 갖게 하는 데 더 큰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지적 동의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마귀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롬 1:5에서 바울이 “믿음의 순종”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는 믿음과 순종이 같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그 사람의 정신뿐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규칙들의 목록과는 반대로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내포한다. 믿음이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만큼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가며 누구를 신뢰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가설명> 동사 ‘믿는다.’는 ‘피스튜오’는 맡긴다는 뜻이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이 말은 누가복음 16장 11졀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는 말씀에서 ‘맡기겠느냐?’가 ‘피스튜오’의 미래형이다. 또 ‘충성치 아니하면’의 ‘충성’이 형용사 ‘피스토스’이다. 그런데 야고보 2:19절에 마귀도 믿고 떤다고 했을 때 ‘믿고’가 ‘피스튜오’이다. 그렇다면 마귀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마귀가 믿는 것은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스티스’ 단어 무리는 문맥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믿고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맡긴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존재하며,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며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맡길 수 있겠는가? 인정하기 때문에 대적할 수도 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인정(믿고)하기 때문에 떨면서 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인정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신자들은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이 지시하는 모든 것은 다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을 예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교훈 :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써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삶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날(목) 믿음이 죄를 조장하는가?

7월 20일

 

바울에 대한 비난 중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는 것이다(롬 3:8, 6:1 참고). 비난자들은 하나님께 가납되기 위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면 어떻게 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논리를 편다. 

 

1.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가 죄를 부추긴다는 비난에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갈 2:17~18)

[갈2:17,1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답: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떻게 죄를 생활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바울은 반대자들의 비난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어조로 대응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가 죄에 빠지는 사람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책임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어긴다면, 범법자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어떻게 묘사하였는가? 이 대답은 그의 반대자들이 제기하는 비판을 어떻게 반박하는가?(갈 2:19~21)

[갈2:19~2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답: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삶은 예수께서 사신 것과 같이 된다. 어떻게 죄를 짓겠느냐고 반박한다.

(※ 갈2:20은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니 번역이 아주 올바르게 된 것 같지 않다. 직역성경이 잘 번역한 것 같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이제 내가 육신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넘겨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 안에서 사는 것이다.”이다. 마지막 구절, 우리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원문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피스티스,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가 옳다. 잘 생각해 보시라. 내 믿음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실함이 중심이다.)

 

바울은 반대자들의 논리가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삶에 어떤 변화도 없는 자들을 의롭게 여기는 하늘의 놀이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야기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완전히 연합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으며 우리의 자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오래된 죄악적 생활 방식이 끝났다고 말한다(롬 6:5~14). 우리는 과거와 단절되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 5: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며, 우리를 날마다 그분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은 결코 죄의 핑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믿음은 율법에 기초한 종교보다 더 깊고 풍부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부가설명> 믿음은 자유를 준다. 그 자유는 죄에 대하여 자유한 것이다. 즉 죄에서 해방되어서 다시는 죄와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죄에서 해방되고 죄에 대하여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의의 종이 된다는 뜻이다.(롬6:16~18)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의가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는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전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은 죄와 상관없게 된다. 예수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믿으면 언제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안전하다는 헛된 생각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사단의 교묘한 논리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안 짓는 사람의 상태에서 아예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의 상태로 성숙해 간다. 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생활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6~9)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상태이다. 위대하도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실상이여!

 

교훈 :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은 죄를 더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청한다.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7월 21일

 

“한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잘못된 사상들을 받아들일 때의 위험이 나에게 반복해서 제시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탄이 이 관점에 대하여 마음을 혼란시키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가인의 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 그분과의 관계를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율법이 회중들에게 크게 강조되고 제시되어 왔다. 나는 구원에 대한 잡다하고 혼란한 사상들 때문에 그리고 목사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고자 활동해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음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수년 동안 나의 마음에 강조되어 온 요점은 그리스도의 입혀진 의이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가장 좋은 선행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욱 열렬하게 강조하고 더욱 빈번하게 되풀이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더욱 확실하게 정립시켜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요점은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믿음과 행함, 18~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인용문에서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보다 더 강조할 주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권면이 오늘날에도 해당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해 보십시오. 우리는 라일락반이랍니다!

※ 라일락 반원들 축하합니다. (라일락 반이라는 말이 왜 내게 온 교과 핵심토의 1번에 적혀 있는지 모르지만 이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할 수 있어서 괜찮다. 글을 쓰고 보니 이것은 TMI 뉴스를 전하는 제목인 것을 알았다.) 라일락은 향기를 풍기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지요. 꽃이 피면 그냥 향기를 풍깁니다. 위의 인용문 다음 24쪽에는 “만일 그대가 사람에게 있는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사랑스런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나 공로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제시한다면 그 제안은 반역으로 간주되어 배격당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➋ ‘만약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다.’라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께서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만일 율법을 지켜서 죄에서 떠나 의롭게 된다면 예수님은 헛일 하신 것이 되는 것이다. 

 

요약: 안디옥에서 보여 준 베드로의 행위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방인들은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음을 암시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의의 기초로 삼지 않으셨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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