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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바울의 목양적인 호소(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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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8-19 08:39 조회4,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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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0분

 

● 연구 범위 : 갈 4:12~20, 고전 11:1, 빌 3:17, 고전 9:19~23, 고후 4:7~12

● 기 억 절 :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갈 4:12).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기탄없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친 언어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영적 번영을 바라는 영감적인 열정의 반영일 뿐이다. 바울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 이외에도 갈라디아서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바른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믿는 교리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교리적 정확성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면, 바울이 그토록 끈질기게 비타협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는 매우 중요하며 복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갈 4:12~20에서 바울은 접근 방식을 조금 수정하여 대화를 이어 간다.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인들이 잘못을 인정하도록 신학적으로 복잡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펼쳐 왔다. 그러나 이제 더욱 개인적이고 목회적인 호소를 시작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바울은 진정한 우려와 염려, 소망 그리고 까다로운 양떼를 향한 선한 목자의 사랑을 보여 준다. 그는 신학을 교정해 줄 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목양하고자 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갈라디아서가 성경적인 논쟁에서 어떻게 개인적 호소로 전환되었는지 이해한다.

느끼기 : 목회자 바울이 갈라디아인들과 나눴던 경험들을 상기시키면서 정서에 호소한 점을 살펴본다.

행하기 : 지도자들의 영적 통찰력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그들을 지지하기로 결심한다.

 

➋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해산의 수고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그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➌ 갈라디아 신자들은 부모의 심정으로 말하는 바울 대신 왜 거짓 교사들을 따랐을까요?

※ 그들이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과 언약의 표를 가져야 된다는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➍ 바울이 사용한 토착화 전략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그들의 처지를 그들처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➎ 바울이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자신처럼 되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 본질과 인격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복음의 근본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➏ 우리가 주님께 인도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를 위해 우리는 어떤 접근 방법을 사용해야 하며, 어떤 모본을 보여야 할까요?

※ 이미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는 예수님을 보여야 한다. 

 

결론 : 격렬한 영적 논쟁 후에 바울은 은혜의 복음 안에 머물도록 갈라디아인들에게 정서적으로 호소하였습니다.

 

 

첫째 날(일) 바울의 심정

8월 20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1. 갈 4:12~20을 읽어 보라. 이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는 기별의 핵심은 무엇인가?

[갈4:12~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답: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낳은 자녀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진리의 바른 길에서 떠나지 않고 바울 자신과 같은 믿음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바울의 심령을 무겁게 짓눌렀던 염려는 12절의 개인적인 호소에 잘 그려져 있다. 이 호소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주장한 뒤에 바로 이어졌다. ‘구하다’라는 말의 원어 ‘데오마이’는 ‘강권하다’, ‘간청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듯한 어감이 강하게 풍긴다(고후 5:20, 8:4, 10:2). 그러니까 바울은 정말 “내가 그대들에게 빕니다!” 하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단순히 신학 사상과 교리적 관점만이 아니었다. 그의 심령은 자신이 목회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영혼들의 삶에 밀착돼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들의 동료 이상으로 여겼다. 그는 그들의 영적 아비였고, 그들은 그의 자녀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해산하는 어미의 걱정과 고뇌에 비유하였다(갈 4:19). 그는 갈라디아 교회를 세울 때에 ‘순산’하기에 충분한 ‘수고’를 하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였고, 바울은 그들의 영적 안위를 위해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수고’를 경험해야 했다.

 

2.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을 위한 그의 ‘수고’로부터 그는 어떤 결실을 보기 원했는가?(갈 4:19)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답: 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목적이 있었고 그 형상을 이루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갈라디아 교회가 자궁에서 형성되는 중인 것처럼 묘사하였는데, 바울은 이제 그들이 마치 출산을 앞둔 어머니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루다’라는 말은 태아의 발달을 언급하는 의학적 용어이다. 이런 은유를 통해서 바울은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 이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급진적인 변화를 내포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서 몇 가지의 사소한 변화가 아닌 그들을 볼 때에 마치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Leon Morris, Galatians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6), p. 142.

 

<부가설명>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바울은 이 사실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산으로 되는 것이다. 해산이란 아이를 낳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태어나는가?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경험으로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가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려면 거듭나야 한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인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자.(고후13:5) 우리의 생각이 영의 생각이 되어 있으면 거듭난 증거가 된다.(롬8:5,6) 우리는 모든 생각이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는가? 육신의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볼 수 있다. 

 

교훈 :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마치 자신이 낳은 자처럼 사랑하고 염려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품은 성숙한 신자가 되기를 기대하였다.

 

 

둘째 날(월) 모본의 과제

8월 21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행 4:12).

 

1. 갈 4:12과 함께 고전 11:1, 빌 3:17, 살후 3:7~9, 행 26:28~29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관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갈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빌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살후3:7~9]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행26:28,29]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답: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갈4:12에는 바울 자신처럼 되라고 하였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여러 번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모방하라고 독려하였다. 모든 경우 바울은 자신을 신자들이 따라야 하는 권위 있는 모본으로 제시하였다. 살후 3:7~9에서 바울은 자신을 모본으로 삼아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 생활을 꾸려가야 할지 가르쳤다. 고전 11:1에서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데 있어서 자신을 닮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갈 4:12에서 바울은 자신을 모방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처럼 ‘되라’고 요구한다. 그는 자신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처럼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세속적 삶의 방식에 있지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있었다. 그것은 ‘행위’보다는 ‘존재’의 문제였다. 갈 4:12의 언어는 바울이 헤롯 아그립파 2세에게 한 말 속에도 나타난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바울은 여기서 율법적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토대로 하는 신앙 경험을 말하고 있다.

비록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그를 닮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지만, 갈라디아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이것은 그의 모든 삶을 구체적으로 포함하는 일반화된 진술이 아니다.

율법 중심적인 신앙이 그들의 문제였기 때문에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한 사랑, 기쁨, 자유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경이로움에 비추어 볼 때 그 외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빌 3:5~9). 그래서 갈라디아인들도 그와 동일한 경험을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부가설명> 본받는다는 것과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은 상태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품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생명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조내가 되는 것은 출생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와 같이 되라고 한 다음 19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거듭나야 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사상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태어나지 않아도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간디가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자기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하고 중심 되는 기별이다. 

 

교훈 : 바울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갈라디아인들도 누리기를 바라며 그들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구했다.

 

 

셋째날(화)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8월 22일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1. 고전 9:19~2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갈 4:12의 서두의 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행 17:16~34, 고전 8:8~13, 갈 2:11~14)

[고전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행17:16~34]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고전8:8~13]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갈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답: 바울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 인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려고 했다. 그가 예수님께 굳게 원칙 위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위치에 서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다는 뜻이다. 

 

2. 갈 4:12은 다소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다.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인들과 같이 되었다면 그들이 바울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갈라디아인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유대인의 율볍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금지 되었지만 그이 율법과 상관없이 복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뜻한다. 

 

어제 본 것처럼 바울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키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확신에 있어서 그들이 자신처럼 되기를 원했다. 그가 그들처럼 되었다는 말은 유대인인 그가 복음으로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되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이방 세계의 위대한 선교사였던 바울은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고전 9:19~23에 따르면 복음은 그대로였지만 선교 대상에 따라 바울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바울은 원주민의 모든 배경을 고려한 접근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토착화’ 또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 개념의 선구자였다.” - Timothy George, The New American Commentary: Galatians (Nashville, Tenn.: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p. 321.

고전 9:21은 복음을 토착화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비록 어떤 사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 자유는 무법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 권리까지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토착화가 항상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문화와 복음의 핵심을 구별할 수 있는 한, 진리의 타협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착화하기 위해서는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 - Timothy George, Galatians, pp. 321, 322.

 

<부가설명> 고전 9장에 있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대상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면 완전한 오해이다. 이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21절의 말씀을 분명히 기록한 것이다. 그가 대상들과 같은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려고 했지만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잘 유지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담배 골초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담배를 피워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 않는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인 바울이 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아야 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처럼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을 얻도록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나타내신 그런 정신으로 그들과 사귀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전도를 위하여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토착화라는 말을 복음의 내용을 그들의 사상으로 각색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입장에 서서 그들을 복음화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한다. 미국 선교사가 옛날에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쌀밥을 먹고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고무신을 신고 생활하면 전도했다면 이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긴 담뱃대를 물고 술을 마시며 한국 문화가 그러니까 나도 그들과 같이 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교훈 : 바울은 어떻게든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과 같이 되는 토착화 전략을 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지는 않았다.

 

 

넷째 날(수) 그때와 지금

8월 23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4:13).

 

바울과 갈라디아 신자들의 관계가 항상 껄끄럽고 냉랭하지는 않았다. 그는 갈라디아에 처음 복음을 전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들의 극진한 대접에 찬사를 보냈다.

 

1.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갈 4:13)

[갈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답: 바울의 육체가 약해진 사실로 갈라디아에 머물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바울이 처음부터 그곳에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선교 여행 중에 걸린 질병 때문에 예상보다 갈라디아에 오래 머물렀거나, 또는 건강을 위해 갈라디아 지방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질병의 정체는 비밀에 싸여 있다. 말라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눈병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바울에 따르면 갈라디아인들은 눈이라도 뽑아 그에게 주려고 했다). 그의 질병은 아마도 고후 12:7~9에 언급되어 있는 “육체의 가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고통이 무엇이든 바울은 그것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시험거리가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질병을 일종의 신의 노여움의 표징으로 여겼던 세계에서(요 9:1~2, 눅 13:1~4) 바울의 병은 갈라디아인들로 하여금 그의 복음을 거절할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환대하였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확신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갈 3:1). 

 

2. 그런데 이제 와서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어떻게 자신의 문제로 씨름할 때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는가?(롬 8:28, 고후 4:7~12, 12:7~10)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후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답: 바울에게 고통을 허락한 이유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에 봉사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돌변한 태도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바울에 대한 비난을 수용하는데서 생겼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바울의 질병의 이유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비난했을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바울의 질병은 분명 심각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복음 전파를 중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종종 질병, 핍박, 가난과 같은 생애의 역경과 자연 재해와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극을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나타내는 기회로 삼으시고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Timothy George, Galatians, pp. 323, 324.

 

<부가설명>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라고 명하였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그가 아파도 감옥에 갇혀도 어떤 역경가운데서도 말씀을 선포했다. 그가 병이 들어서 갈라디아에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갈라디아에 머물게 된 것은 치료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기회를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사용한 것이다. 바울은 많은 환자들을 성령의 역사로 치료하였다. 그의 손수건을 환자에게 갖다 놓아도 환자가 나았다.(행19:12) 그런데 바울은 병이 낫지 않았다.(고후12:7~9) 또한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도 잦은 병치레를 했다.(딤전5:23) 바울이 기도로 이적을 행하여 낫게 할 수 없었는가? 병 낫게 하는 이적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할 때에 나타내신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방편이다. 바울은 자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기간에도 복음을 전하였고 바울의 고백대로 바울이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 모습이다. 

 

교훈 : 바울이 건강상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갈라디아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날(목) 진리를 말함

8월 24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6).

 

1. 갈 4:16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대는 어떤 방식으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요 3:19, 마 26:64~65, 렘 36:17~23 참고)

[갈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마26:64,6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렘36:17~23] 그들이 또 바룩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그 구전하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뇨 청컨대 우리에게 이르라 18 바룩이 대답하되 그가 그 입으로 이 모든 말을 내게 베풀기로 내가 먹으로 책에 기록하였노라 19 이에 방백들이 바룩에게 이르되 너는 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고 너희 있는 곳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니라 20 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로 왕의 귀에 고하니 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 여후디가 삼 편 사 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답: 자기가 바르지 못할 때 바른 말을 거부한다. 갈라디아인들도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빠져있기 때문에 바른 복음을 원수로 보게 되었다.

 

‘참말을 하다’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의미로 들리기 쉽다. 그 말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말할 때, 상대방의 거리낌이나 불쾌감은 고려하지 않은 채 대놓고, 노골적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준다. 만약 갈 4:12~20에서 바울의 이러한 언급이 나오지 않았더라면(갈 6:9~10 참고), 진리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사랑의 표현보다 중요했다고 잘못 결론지어졌을 것이다. 물론 갈라디아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는지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갈 2:5, 14 참고), 바울의 그런 염려는 그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를 나무라야 하거나, 단순히 진실을 알려 주어야 하는데 이유야 어떻든 상대방이 들으려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말이 당시에는 마음의 상처와 분노와 억울함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속상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들으려 하지 않을지라도 들을 필요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어쨌든 그렇게 말한다.

 

2. 갈 4:17~20에서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그들의 신학 외에 어떤 다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가?

[갈4:17~20]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답: 반대자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인들고 바울 사이을 이간시키려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이기심으로 너희를 이용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갈라디아인들의 분노를 살 위험을 감수했던 바울의 솔직성에 비하여 그의 반대자들은 갈라디아인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바울이 반대자들에게 대하여 “저희가…너희를 이간 붙여”, 또는 “너희를 배제하여”라고 한 말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이 말은 아마도 할례를 받기까지 복음의 특권에서 그들을 제외시키려는 시도를 뜻하는 것 같다.

 

<부가설명> 말씀을 가지고 다니는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암시가 나타나면 예수를 위한 헌신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다니면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도 같은 문제는 있다. 목회가 주님을 위한 것인지, 자기를 위한 것인지 목회자는 자문해야 할 것이다.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는 자는(딤전6:5) 갈라디아에 나타난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단들이 이런 경향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교회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요2:16, 마21:12,13) 다른 교단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기뻐할 것인가? 교단 문제이기 전에 목회자 개인의 문제이다. 목회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교인들은 말씀에 근거해서 목회자들의 일탈을 사랑으로 방지하는 울타리 노릇을 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목회자들과 싸우라는 것이 아니다. 함께 바른 길을 가는 복음의 역군들이 되자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목회자와 성도들이 피차 명심할 말씀이다. 

 

교훈 : 바울의 반대자들은 입지를 넓히기 위해 갈라디아인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바울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월 25일

 

<사도행적>, 383~388 “갈라디아의 배도”를 읽어 보라.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공공연하게 정체를 드러낸 오류가 복음 기별을 대신하고 있었다. 신앙의 참기초이신 그리스도는 낡아빠진 유대주의의 의식 때문에 사실상 포기되었다. 사도는 갈라디아 신도들이 위험한 감화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방법으로 가장 신랄한 경고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울은 한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첫사랑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논박할 수 없는 논증으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남녀가 되는 특권을 그들 앞에 제시하였다. 그분의 속죄의 은혜를 통하여 완전히 복종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는다. 바울은 구원받을 모든 영혼들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진정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도의 열렬한 호소는 헛되지 않았다. 성령께서 강한 능력으로 역사하셨으므로 낯선 길에서 방황하던 많은 사람이 이전 신앙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하게 하신 그 자유에 확고부동하였다”(사도행적, 385~38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은 고통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고통으로부터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고통을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나타나는 도구로 삼는다.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한다면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깨닫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➋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주제를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이 이루어지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생각했던 만큼 빨리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진정으로 거듭나면 근본적으로 이루어진다. 다음은 그것이 성숙해 가는 것이다. 열매가 한꺼번에 익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잎이 열매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열매가 익어간다는 말이다.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요약: 바울은 구체적이고 복잡한 신학적 논증을 펼친 후에 좀 더 개인적이고 감성적으로 갈라디아인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한때 함께 나누었던 진실한 사랑과 영적 부모로서 그들에게 보인 자신의 관심을 상기시키면서 자기의 권고를 들으라고 간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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