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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하나님께 정직함(질문, 대답, 부가설명)0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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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2-10 07:29 조회2,0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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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3분

 

● 연구 범위 : 눅 16:10, 레 27:30, 창 22:1~12, 히 12:2, 눅 11:42, 히 7:2~10, 느 13장

 

● 기억절 :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정직한 마음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시대의 문화는 종종 정직을 약간 모호하고 상대적인 윤리로 간주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우에 따라 부정직해지며, 심각한 위반이 아닌 것들은 수용할 만한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특수한 환경에서는 부정직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리와 정직은 항상 함께한다. 우리는 정직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훈련된 덕성으로서 청지기의 도덕적인 성품의 중심에 위치한다.

우리가 정직을 연습하면 그것으로부터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에 사로잡힐 염려가 없고 그것을 감출 필요도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직은 가치 있는 인격의 특성이며 특별히 부정직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난감한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십일조의 실천을 통해 정직이라는 영적인 개념을 연구하며 십일조가 청지기 직분에 매우 중요한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학습목표

1. 깨닫기 : 하나님께 대한 정직이 믿음으로 충만하고 진실한 삶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믿는다.

2. 느끼기 : 정직이 가져다주는 정서적인 자유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얻는 특권을 누린다.

3. 행하기 : 십일조 생활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➋ 성경이 십일조를 정직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말 3:8)

※ 십일조는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이기 때문에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➌ 십일조가 헌금이나 감사의 예물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요?(레 27:30)

※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드려야 하는 것이다. 

➍ 그대는 십일조 생활과 믿음의 성장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➎ 그대는 십일조를 더 많이 드리는 것과 정확하게 드리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까?

※ 정확하게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다. 

➏ 십일조 생활에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격려하는 것이 좋을까요?

※ 십일조의 복음적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서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게 격려하자.

 

결론 : 정직한 십일조 생활의 관습은 부족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도 하나님과 협력하며 살아가는 특권을 제공합니다.

 

 

2월 11일(일) 단순한 정직의 문제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우리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중의 하나는 부정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정직하게 행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면서 ‘뭐, 그렇게 나쁜 짓도 아닌데…그냥 사소한 일이고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잖아.’라고 하면서 그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한다.

“부정직이 우리 대열 전체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뜨뜻미지근한 원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그들 스스로 영혼을 속이고 있다”(교회증언 4권, 310).

 

1. 눅 16:1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작은 일에도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원칙을 설명하셨는가?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답: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품 문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정직해지기 쉽고 특별히 우리가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그래서 적어도 물질적인 소유물에 관한 한 부정직과 이기심 문제를 해결할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셨다.

 

2. 레 27:30과 말 3:8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정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레27: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답: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것이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는 것이다. 

 

<부가설명> 십일조 제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잘 붙들어 두시려는 사랑으로 주신 제도이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도 아담 안에서 육체가 되어버린 첫 사람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지체 가운데 있기 때문에 견물생심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을 아시고 그 마음에 하늘에 두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땅도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가축도 하나님의 것이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여 이윤을 남겼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신 하나님의 소유권을 확실히 인정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천국적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라고 노래한 다윗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드리는 기쁨을 노래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3,14) 이런 감사와 기쁨이 십일조를 드리는 마음이어야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과 감사와 기쁨을 드리는 제도이다. 

 

교훈 : 인간은 자신의 부정직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인 부정직과 이기심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십일조 생활에서 정직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2월 12일(월) 믿음의 생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1. 창 22:1~12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했는가?

[창22:1~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답: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다. 

 

믿음의 삶은 일회적인 사건과는 다르다. 우리는 한 번의 놀라운 방법만으로 믿음을 표현할 수 없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고 사는 충성스럽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보여준 믿음의 행위에 감탄한다(창 22장). 그러나 이 믿음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앞서 살아온 믿음과 순종의 생애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가능했다. 그가 이전에 신실한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이 시험을 통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소유자이기에 틀림없이 그 이후에도 믿음을 실천했을 것이다.

요컨대 청지기의 믿음은 일회적인 믿음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의 생애는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실천하는지에 따라 더 깊어지고 강해지든지 아니면 얕아지고 약화된다.

 

2. 히 12:2을 읽어 보라. 믿음의 근원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답: 예수님만 주목하고 살아야 한다.

 

신실한 청지기로서 우리의 유일한 자원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히 12:2)는 것이다.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 중 여기에서만 등장한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성숙함과 완전함에 이르게 하는 데 여념이 없으시다는 뜻이다(히 6:1~2). 따라서 믿음 곧 믿음의 생애는 하나의 역동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자라고 성숙해지며 증가한다.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생활하신 것과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예수님께 약속하는 것이다. 그 약속 예식이 침례식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함께 예수님을 모를 시절에 생활하던 삶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만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예수를 믿는 믿음은 이론이 아니고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도 아니다. 예수님처럼 생활하는 것이다. 거듭난 생명이 그를 주장하면 그 생명의 작용으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즉 생명이 있으면 행함이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야고보가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의 생명으로 작용한 것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증명하였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인정하신 것이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신자 안에 작용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믿음의 생애는 하나님의 청지기에게 중요한 자원이며 믿음은 그것을 실천하는 생애를 통해서 더욱 강화되며 자라난다.

 

 

2월 13일(화) 믿음의 표명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어제 보았듯이 믿음은 이론상 자라고 성숙해지는 하나의 과정이자 역동적인 경험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십일조는 율법주의적인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하늘을 얻고자 일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믿음의 표명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외부로 나타내 보이는 개인적인 표현이다.

물론 누구나 자신에게 믿음이 있으며 자신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귀신들도 믿”(약 2:19)는다. 하지만 자신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1. 눅 11:42을 읽어 보라. 십일조 생활을 포기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십일조는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눅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답: 십일조를 세금 내듯이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진정한 믿음의 삶이 아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공의를 믿는다는 증명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겸손의 표현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다는 신뢰의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엡 1:3) 이미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이상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2. 창 28:14~22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창28:14~22]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답: 하나님의 집이 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반응했다.

 

“하나님의 십일조 제도는 그 단순성과 평등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기별, 73).

“그 안에는 단순성과 유용성이 겸비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깊은 학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모든 사람은 귀한 구속 사업을 성취하는 일에 한몫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남녀와 청년들은 주님을 위한 재무가 되어 그 창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꾼이 될 수 있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기별, 73).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생활하면 된다. 생활은 이론이 아니다. 생명이 작용하는 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물론 생명이 작용하는 배후에 생각이 있다. 바른 생각을 하면 바른 행동이 나온다. 생명작용과 생각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위인(爲人)이라는 말은 ‘사람됨’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형성된다는 뜻인데 특히 인격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의 생각을 차지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한다. 가룟 유다에게 예수 팔 생각을 넣었고 성공했다.(요13:2)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게 한다.(롬8:5~7) 그리스도인은 그 생각이 성경적인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의 말들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생활하는데 어려운 것은 거의 없다. 기뻐하라 하셨으니 기뻐하면 되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기도하면 되고, 감사하라 하셨으니 감사하면 된다. 이웃을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면 된다. 이런 생활하는 말씀들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바치라 했으니 바치면 된다. 단순하지 않는가? 생각이 성경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교훈 : 십일조 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명이자 구원의 결과로서 율법에 순종하는 믿음의 성장 방편이다.

 

 

2월 14일(수) 정직한 십일조 : 하나님께 거룩함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미 그분이 소유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바친단 말인가?

 

1. 레 27:30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십일조에 관한 어떤 중요한 요점들을 찾을 수 있는가?

[레27: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답: 십일조는 여호와 성물 곧 거룩한 것이다. 땅과 곡식과 나무의 열매 이 모두는 여호와께서 주셔서 관리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분 지정한 십일조는 거룩하다.

 

“십일조는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거룩하다. 그것은 어떤 맹세나 성별의 행위를 통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본질상 거룩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것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십일조는 한 개인의 자산 중 일부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것을 여호와께 성별할 수 없다”—Angel Manuel Rodriguez, Stewardship Roots (Silver Spring, Md.: Stewardship Ministries Department, 1994), p. 52.

우리가 십일조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그분의 것을 그분께 돌릴 뿐이다. 십일조는 특별한 임무를 위해 하나님께 구별된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간수하는 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거룩한 십일조를 돌려드리는 습관은 절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2. 히 7:2~10을 읽어 보라. 바울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아브라함에 대해 논한다. 그의 논의는 어떻게 십일조의 중요성을 더 깊이 드러내는가?

[히7:2~10]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답: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그의 후손들도 십일조를 드린 것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후손들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지적하고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적한다. 

 

안식일이 거룩하듯이 십일조도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구별되다’라는 뜻이다. 안식일과 십일조는 이러한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제칠일 안식일을 성결하고 거룩하게 구별하듯이 십일조를 하나님의 성결하고 거룩한 소유로 구별한다.

“하나님께서 제칠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시간 중에 그 특별한 부분은 종교적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구별하셨기 때문에 그날은 우리 창조주께서 처음 성별하셨을 때와 똑같이 오늘날도 신성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수입 중에 십분의 일은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기별, 66).

 

<부가설명>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를 샀다. 우리가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곧 불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자기의 피로 사시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서서 간구하는 예수님은 우리를 샀기 때문에 당신의 소유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보여드린다. 우리가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증거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소유권 문제가 걸린 일이다. 안식일은 존재와 생명이 창조주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동이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샀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을 시인하는 자세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즙을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과 그 일행들을 대접하고 축복했다. 빵과 포도즙은 최후의 만찬을 표상한다. 예수님의 고과고 희생을 지적한다. 그래서 우리를 산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을 표상하는 대제사장이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요 그의 피로 우리를 샀기 때문에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믿음의 일이었다.

 

교훈 : 십일조는 우리가 구별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께 속한 것임으로 거룩하다.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처럼 십일조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2월 15일(목) 부흥과 개혁 그리고 십일조

 

히스기야의 재임기는 유다 왕국의 전성기로 간주된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복을 그처럼 크게 누린 적은 없었다. 대하 29~31장에는 히스기야 시절의 부흥과 개혁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대하 29:2)였다.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이 순서대로 갖추어”(대하 29:35)졌다. 유월절을 기념했고(대하 30:5),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대하 30:26)다. 이방의 우상, 제단, 산당들이 파괴되었다(대하 31:1). 그러자 예기치 않은 심령의 부흥과 관습의 개혁이 일어났고 그 결과 풍성한 십일조와 예물이 바쳐졌다(대하 31:4, 5, 12).

 

1. 느헤미야는 부흥과 개혁과 십일조의 또 다른 예를 보여준다. 느 9:2~3을 읽어 보라. 이를 통해 볼 때 심령의 부흥이란 무엇을 뜻했는가? 느 13장을 읽어 보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전”을 개혁한 뒤에 유다 백성들은 그곳에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느 13:12)

[느9:2,3]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13:1~13]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11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라.

 

답: 부흥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생각이 변하는 것이고 개혁은 변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느헤미야 때 이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부흥과 개혁은 서로 다른 것이다. 부흥은 영적 생애를 재생시키고 마음과 정신력을 소생시키며 영적 죽음에서의 부활을 뜻하며, 개혁은 재조직 그리고 사상, 이론, 습관, 행동의 변화를 뜻한다”(그리스도인 선교봉사, 42).

부흥, 개혁, 십일조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십일조를 돌려 드리지 않고서는 설령 어떤 부흥이 일어날지라도 부흥과 개혁은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편에 적극 가담해야 할 때조차 우두커니 잠자코 있을 때가 많다. 부흥과 개혁은 헌신을 요구하며 십일조는 그러한 헌신의 일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에 뒷짐을 지고 있으면 우리가 그분에게 요구하는 일에 그분이 응답해 주시리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부흥과 개혁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밖에서 일어나지 않는다(시 85:6). 우리는 하나님께 부흥을 달라고 간구하고(시 80:19) “처음 행위를 가지”는 개혁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계 2:5).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에 관하여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동기와 헌신을 나타내는 마음과 감정의 결정이다. 그 결과로 믿음이 증가하고 영적인 시야가 밝아지며 정직함이 회복된다.

 

<부가설명> 우리의 심령은 말씀으로 일깨워져야 한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전부가 아니다. 재림성도들은 말씀을 읽고 깨달으며 기도하고 사상이 성경적으로 바뀌고 라이프스타일이 성경적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그렇게 변화된 재림성도들을 통하여 재림기별이 전파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고후10:5) 그럴 때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과 같이 될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에 귀환한 유대인들은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지도 아래 말씀으로 심령이 부흥되었고 결과로 변화된 생활이 실천되었다.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키고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렸으며 가족 신앙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렇게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도들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부흥과 개혁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인 일로 끝나게 된다. 사탄이 계속해서 우리를 세상적으로 바쁘게 하고 이끌고 가려고 해을 쓰기 때문이다. 

 

교훈 : 심령의 부흥이 있어야 생활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정직한 십일조는 진실한 부흥과 개혁의 반응이자 결과이다.

 

 

2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은 성경에 진술된 모든 언약을 주도하셨고 그분의 백성을 이러한 언약의 관계로 이끄시는 데 앞장서셨다(히 8:10). 언약의 약속들은 그분의 은혜와 사랑, 우리를 구원하려는 열망을 반영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하나님, 수혜자, 언약의 조건들, 조건에 대한 양측의 헌신, 언약을 지키지 못할 시에 받을 형벌, 의도하는 결과 또는 기대하는 성과 등 많은 것을 포함한다. 말 3:9~10을 보면 십일조의 개념에 이러한 것들이 반영된다. 이 성경절은 하나님과 그분의 청지기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십일조 언약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그 같은 언약 관계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적인 사상에 반대하고 회심한 죄인의 심령으로부터 선한 것이 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가시적인 표증이 된다.

“닫히고 이기적인 마음이 사람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주께서는 사람들과 특별한 언약을 세우셨으니 그것은 곧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의 발전을 위하여 정해진 부분을 규칙적으로 구별한다면 주님께서는 풍성하게 축복하사 주의 선물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너희는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주께서는 분명히 선포하신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기별, 77).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삶에는 의무가 따른다. 우리는 언약의 약속들을 누리면서도 명령과 의무는 싫어할 때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언약에는 양면성이 있다. 십일조는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한 측면에 해당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 입장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왜 중요한 믿음의 행위입니까?

※ 하나님의 소유권과 예수께서 우리를 자기 피로 사신 것을 시인하는 믿음의 행위이다. 

 

➋ 십일조를 드릴 형편이 못 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십일조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도록 설명해 줘야 한다. 

 

➌ 십일조가 거룩하다는 인식을 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십일조가 거룩하다는 사실은 그대가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 성경의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거룩하게 드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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